JUNG SOO JUNG
@sooj.jung
veinjung@gmail.com
《Falconry(매사냥)》
권혜인(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매력적인 인물 도상과 에너지 넘치는 상상의 세계가 힘 있는 붓질로 완성되는 정수정의 작품은 직관적인 이해로도 충분히 감각적 만족을 주지만 하나하나 해석해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다. 이 글에서는 활발한 활동으로 지난 몇 년간 축적되어 온 정수정의 작품들을 구조적 측면에서 파악해 입체화해보고자 한다.
정수정의 작품세계를 구성하는 축은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자연과 인간문명과의 관계에 대한 작가 자신의 세계관으로, 자신의 경험과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순수한 대자연의 원리, 작고 희미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생명력과 역할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또한 작가 자신의 존재론적 주제와도 연결되기도, 대체되기도 한다.
두 번째는 문화적 도상과 표현 양식의 사용이다. 고전 회화에서부터 영화,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광고 같은 대중문화 시각물들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보여주는 주제, 그 안에 등장하는 형태들이 상징하는 의미, 포즈나 동세가 보여주는 감각들을 연구하고 현재화 한다.
세 번째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세계’를 회화적 장면으로 구현해내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작품을 구성하는 첫 번째 축인 자신의 세계관을 ‘현실의 모사’가 아닌 회화의 언어로 표현하겠다는 의미이자, 두 번째 축인 문화적 도상과 표현 양식이 가진 인공적인 속성을 탐구하고 재구성하여 회화의 순수성을 획득하겠다는 선언으로도 읽힌다.
이렇게 작가의 ‘세계관 - 표현 양식의 실험 - 회화적 지향’은 각각 거대한 세계(‘자연과 인간문명 - 문화적 도상 - 상상과 순수성’이라는 그 자체로 수많은 작가들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천착해온)를 참조하면서, 서로를 추동하는 관계로 하나의 화면에서 동시에 구축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축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대개 전시별로 하나의 소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결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특성들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
개인전 《Sweet Siren》(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18)에서 신과 님프의 도상, 《A Homing Fish》(갤러리 밈, 2019)에서 회귀성 물고기처럼 자연이라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들, 《빌런들의 별》(OCI 미술관, 2020)에서 영화 속의 빌런 유형이 등장하였다면 이번 전시 《Falconry(매사냥)》에는 주로 여성과 새, 동물들이 등장한다. 참매로부터 영감을 받아 전시를 아우르는 주제를 새, 동물, 날다, 부유하다, 정지하다, 공존하다 등으로 잡았다고 한다.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과 새, 동물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표현 양식과 세계관, 상상의 표현이 어우러진다.
우선 새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럿 눈에 띄는데, 어딘가로 날아가는 새들의 무리는 《A Homing Fish》에서의 물고기처럼 자연에 속해있는 숙명적인 존재로 보인다. 또 이 작품들은 기존 매체가 시각화해 온 전형적인 ‘날거나 부유하는’ 동적인 묘사를 회화적 한 장면으로 압축하거나 조형 요소로 변환시켜 특별한 정조를 자아내고 있다.
한편, 인물화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Tronie>시리즈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인물화 ‘트로니(Troni)’에 대한 작가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형화된 귀족들의 초상이 아니라 표정 위주의 생동감 넘치는 스냅샷 같은 트로니는 그 자체로도 SNS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데다, 실제로 존재하는 모델을 그린 것이 아닌 허구의 인물을 창조해낸 것이라, 작가는 이를 동시대 상상 인물화에 대한 실험을 위한 소재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전에도 꾸준히 인물 표현을 실험해왔던 작가는 구체적인 생김새보다 뉘앙스로 그 캐릭터를 보여준다거나, 인물의 포즈와 연결되는 분위기를 얼굴에 담아낸다거나, 자세하고 특정한 표정보다는 감정 자체를 회화적 표현으로 담아내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번에도 깃털이 달린 옷을 입은 여성(또는 반인반조(半人半鳥))군상의 여러 표정을 한 화면에서 보여준다거나 동물들이 사람과 함께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표현을 복합화, 확장시키고 있다. 동물들은 여성들과 감정적으로 동기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여성의 어깨 위에 앉거나 품에 안겨있는 등의 포즈를 통해 신체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고개를 돌린 여성 대신 감상자 쪽을 바라보고 있는 표범은 하나의 연장된 인물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여성과 동물의 쌍, 특히 참매를 어깨에 얹은 여성은, 트로니 이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도상을 연상시키는데, 그것은 바로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원령공주>의 여성과 동물이다. 전시되는 모든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전시의 세계관과도 맞닿아 있어 언급하고자 한다.
도상이라는 것이 사회 문화적으로 약속된 시각적 기호라고 보았을 때, 문자가 조합되어 단어와 문장이 되듯 대중문화의 이미지나 형식이 조합되면 감상자는 일차적으로 해당 레퍼런스를 떠올리며 의미를 인지하게 된다. 대중문화의 도상들은 대부분 미디어 노출로 생활반경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접한 적이 있는 것들이라서 감상자가 이를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작품에서 동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날거나 달린다’ 또 ‘무엇인가를 향해 전진 한다’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함께 ‘연약해 보이는 소녀가 자연을 위해 동물들과 함께 인간 문명에 맞선다’ 또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 해야 한다’ 같은 작가의 세계관까지 암시하게 된다.
즉 작가는 자연과 인간 문명의 공존이라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물화와 애니메이션 양식의 변형을 통해, 자신만의 회화적 장면을 만들고 상상의 세계를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의 세계관을 전달하는데 중심이 되는 여성과 새, 동물 도상은 전시의 서두에서 만나게 되는 작품 <Mating(교미)>에서 더욱 독자적이고 발전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Mating(교미)>은 길이 약 7m의 대형 작품으로 고전적인 벽감 아치 형태를 암시하는 색면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저 너머 세계의 폭포와 다양한 생명체들을 담아내고 있다. 움직이기 전 응축된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정적인 형태의 <Tronie>시리즈들과는 달리 역동감이 넘치는 이 작품은 제목처럼 동물들과 여러 새들이 환희의 순간을 수놓고 있는 상상도이다.
등장하는 동물들(또는 생명체들)의 표현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넘어서려는 작가의 의도 속에서 마치 한 여성 래퍼의 뮤직 비디오처럼 여성 주도적 성적 표현을 가득 담고 있는 전략적이고 상징적인 유쾌한 밈(이 또한 하나의 현대적 도상이다)과 공명하며, 자유롭고 본능에 충실한 자연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에너지와 생명력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반면 여성은 작품상에서 보이지 않는데, 이에 대한 숨겨진 힌트는 작품의 초기 드로잉에서 드러난다. 폭포 중앙에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오무’ 같은 상상 속 생명체의 형상이 금목걸이 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초기 드로잉에는 그 안에 폭포를 등지고 무릎을 꿇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흘러가는 폭포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그녀는 곧 오무 같은 형상으로 뒤덮이고, 그것은 물보라 이는 폭포 아래, 마치 생명력의 근원처럼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Mating>은 마법소녀의 변신 순간처럼, 숨겨져 있던 여성성과 자연의 생명력이 폭발하는 순간을 장면화 한 것일 수도 있겠다.
또한 이 작품은 작가가 실제 폭포가 흘러내리듯 3차원으로 회화를 구성한 첫 시도로, 많은 작품들이 비대면을 전제로 구상되는 상황에서 직접 현장에서 이 작품을 보아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폭포가 쏟아지고 흘러가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물감을 상상해보라)
<Mating>의 초기 드로잉, 부분
많은 작가들이 회화로 스크린이나 모바일의 감각, 일상성의 이미지를 연구하는 흐름 속에서 ‘도상’이라는 형식을 동시대적으로 번안하고 재구성하는 정수정의 ‘상상의 세계’는 무엇보다 한계 없이 역동적인 회화적 표현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감상자에게 (도상을) 인지하는 즐거움과 공감,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맥락이나 층위와 뒤섞이게 될 때 신선한 깨달음을 안긴다. ‘세계관 - 표현 양식의 실험 - 회화적 지향’의 조합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정수정 작가의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이다.

불순하기 위한 핑계들
유지원
1. 정수정은 보스에 응답한다(<Giving answers to Bosch>). 하지만 보스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던가?
15-16세기 네덜란드에 살았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는 아무런 일기나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서명조차 하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보스가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를 고증하고, 각 작품의 맥락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에 적잖은 애를 먹었다. 특히 삼면제단화인 <지상의 환락의 정원>을 놓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 종교화가 마땅히 지녀야 할 교훈적인 메시지와 사뭇 대조적인 시각적 쾌감은 많은 연구자들을 꾀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보스가 이교도에 물들어 있었다거나 그가 연금술사였다거나 환각제를 사용했다는) 온갖 설이 나도는 바람에 미술사가들이 앞다투어 주지의 세폭화에 도입된 전통적 도상을 분석하여 중세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티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증명해야 할 강박을 앓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1]
보스에 응답한다니, 정수정도 마찬가지로 보스의 반전 매력에 매료되고 말았던 것일까? <Giving answers to Bosch>를 들여다보자. 우선 서사의 전개를 전제하는 삼면제단화(에덴-세상-지옥)와 달리 정수정의 화면은 다섯 폭으로 되어 있고, 좌에서 우로 전개되는 명확한 서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보스는 남과 여, 인간과 동물, 혹은 각종 하이브리드를 포함한 다채로운 존재들을 그려냈지만, 정수정의 응답에서는 행동이나 비율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동질적인, 앳된 얼굴에 피부가 보라색인 존재들이 잔뜩 그려져 있다. 보스가 세 폭의 화면을 조밀하게 채우되 지형지물을 중심으로 균일한 구도를 설정한 것에 반해 정수정의 화면에는 형상들이 서로를 무질서하게 겹쳐져 별다른 시선의 인력이나 척력을 느낄 수 없다. 물론 제목이 없더라도 보스의 그림을 참조했다는 점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데, 그것은 단지 전경과 배경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은 구성과 인간(을 닮은) 형상들이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스가 정수정에게 어떤 질문이 되어 다가왔던 걸까? 애초에 보스를 향해 대답하고 있기는 한 걸까? 굳이 500년쯤 전에 탄생한 그림을 소환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연상시키는 분위기나 온도에 편승하여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사람으로서 자유를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는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제멋대로 구는 반인간들을 잔뜩 그려 넣을 핑계, 성별이나 행동의 목적을 파악하기 어려운, 바로 그 순간에만 집중하는 이 존재들로 화면을 가득 채울 명분. 무거운 함의가 달라붙는 코드를 사전에 차단한 채 젊고 매끈하고 행동하는 몸을 그릴 수 있는 구실.
2. 님프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던가?
적당한 명분 위에 등장한 인물들을 살펴보자. <Giving answers to Bosch> 속 보랏빛 존재들의 얼굴은 굳이 따져보면 소녀 쪽에 가깝지만 몸은 좀 애매하다. 남자도 여자도, 소녀도 소년도 아닌 미끈한 몸통과 팔다리. 이들은 불에 타고 있는 책을 곁에 두고 나 몰라라 잠들고, 나무를 타고, 서로 목을 조르고,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기타를 치거나 노래를 부른다. 총을 겨누는 일도 있지만, 딱히 중범죄를 저지르거나 파격적인 일탈을 일삼을 것 같지는 않다. 이 존재들의 동력은 불타오르는 원초적 욕망보다 경솔한 충동에 더 가깝다. 작가는 치명적이기보다 성가시고, 넋을 빼놓을 만한 매력을 풍기기보다 대체로 무심한 이 존재들을 그릴 때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님프 혹은 정령을 떠올렸다고 했다.
님프는 미술사에서 대체로 매혹적인 여체로 표상되는데,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윌리엄 부게로나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작품에서 그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부게로의 <님프와 사티로스>(1873)에서 님프들의 몸은 반인반수인 사티로스를 제압할 때조차 말랑하고 보드랍다. 워터하우스가 <힐라스와 님프들>(1896)에서 구현한 정령들은 투명한 피부에 연약한 관절을 지닌 한편 몸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몽환적인 표정을 짓는 데에 집중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지난 수 세기 동안 님프가 남성 화가들에게 젊은 여자를 그릴 수 있는 구실이었다는 듯이. 물론 부게로와 워터하우스가 각자 원하는 대로 여체를 그리는 데에 눈치 볼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렇다면 정수정은 이처럼 님프가 대상화된 신체로 재현되어 온 관습에 도전하고자 하는가? 물론 해석의 여지가 있겠으나 작가가 보스의 세폭화를 구실 삼았던 것을 견주어 보건대 정령을 재해석하는 것이 딱히 중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님프를 이용한다는 점은 선대의 화가들과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작가는 부게로나 워터하우스와 어떤 면에서는 동질적인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젊고 건강한 몸, 그중에서도 여체를 그리고 싶은 충동 같은 것. 그것이 미술사적 맥락에서 학습된 것인지 여성을 집요하게 대상화하는 시각 체계가 이미 체화되어 버린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수정의 님프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성애화되지 않았을 뿐 굳이 예쁘장하기를 그만두지는 않는다. 여전히 귀여운 엉덩이를 갖고 있고, 부드러운 선의 이목구비에 단발머리가 잘 어울린다. 다만 이 님프들의 몸은 대체로 밋밋하고, 그저 각자의 포즈와 동작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여 또 다른 충동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가슴이나 성기와 같은 불필요한 표식들이 사라지고, 각 인물은 자신의 위대할 것 없는 의지에 따라 순간적으로 반응하여 움직인다. 인간도 신도 아니므로 무책임하게 행동해도 비난을 비껴가는 정령은 ‘동산에서’ 혹은 ‘붉은 석양과 함께 탄생’하여 ‘밤의 산을 가르’고, ‘동쪽 숲’이나 ‘가을 산을 지’킬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에너지를 분출해낸다.
결국 정수정은 조연에 불과한 님프가 실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여 간혹 미소년을 납치한다든지 신들과 놀아난다는 신화적 설정을 굳이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수 세기를 거듭하여 매력적인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설정에 가볍게 편승하여 뻔뻔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존재를 그려낸다. 이렇게 작가는 공유된 거대한 유산 혹은 데이터베이스에서 결국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 위한 적당한 전거를 추출한다.
3. 사소한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정령이 회화 몸체를 얻는다면?
보스의 세폭화를 담보 잡고, 정령의 신화를 자원 삼아 그려낸 제멋대로인 님프들. 그런데 이처럼 정수정의 님프가 가능했던 조건은 보랏빛 몸의 윤곽을 빠져나와 회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가을 산을 지키다>, <너에게 석양을 보내다>, <Heaven’s Door>, <신선한 열매의 결실에 대한 담화>. 이 작품들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평면 속 대칭성은 순식간에 안정감을 선사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질적인 면과 색과 두께와 질감이 뒤섞인다. 좌우 혹은 상하로 접히는 윤곽 위에서는 배경이 피사체를 뚫고 드러날 수도 있고, 캔버스에 곧바로 그려진 연필 스케치가 서로 다른 두께로 얹힌 물감과 나란히 놓일 수도 있다.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경우라도 <붉은 석양과 함께 탄생한 자>나 <동산에서 태어난 자>의 경우 캔버스 중앙에 신적인 존재가 전경에 배치되어 대체로 균형감을 확보한다. 회화 표면에 물감을 두껍게 올려 마띠에르로 보이기보다 양각으로 무늬를 더한 것 같이 보이는 표현이나 하나의 그림으로 녹아들기보다 인위적인 장식처럼 부착된 테두리. 전형적인 구도나 대칭성은 모종의 레버리지로 작동하여서 한 캔버스 안에 뒤엉킨 여러 질감과 부피감의 충돌을 완결된 작업으로 팽팽하게 붙잡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충동을 따라 그저 제멋대로 행동할 뿐인 인물들이 님프라는 설정을 근거로 그 어떤 해명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정수정의 회화는 갈수록 최소한의 형식적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어디까지 짓궂을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는 듯하다. 갈수록 정령은 초상으로 남거나 아예 원래 갖고 있던 몸을 아예 포기한다. 이제 회화 자체가 정령과 같은 것이 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 참고: 월터 S. 기브슨, 김숙 역, 『히에로니무스 보스: 중세말의 환상과 엽기』, 서울: 시공사, 2001.
Justifying Mischief
Jiwon Yu
1. If Soojung Jung is Giving Answers to Bosch, Then What Were His Questions?
Dutch painter, Hieronymus Bosch (c.1450-1516), didn’t leave a diary—or any letters. It was rare for him to sign his paintings. In light of this, researchers have had great difficulty even confidently attributing Bosch’s paintings, let alone deciphering each painting’s context and meaning. Notably, there has been a great divergence of opinion about his triptych,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The palpable visual pleasure which Bosch took in the painting sits in stark contrast to the didactic messages which were considered essential to religious painting at the time; this has proved a quandary to researchers who to try and find a close connection between the motifs and icons Bosch used and those found in wider medieval culture and literature. Such enquiries stand in opposition to more idiosyncratic notions of Bosch as a pagan, an alchemist, or as an imbiber of hallucinogenic drugs[1].
In answering Bosch, was Soojung Jung fascinated by this same twisted attraction? Let’s look at her painting, Giving Answers to Bosch. The picture consists of five panels while Bosch’s work is made up of three. In Bosch’s garden, a clear narrative reads from left to right. This is not the case in Jung’s. Bosch painted men, women, humans, animals, and various other creatures—including all sorts of hybrid creatures. Jung’s response is populated by creatures with youthful faces and violet colored bodies, they share a general homogeneity even if there are certain differences in their actions or scale. While Bosch fills his three panels densely, letting a uniformed composition pivot on geographic features, Jung’s picture doesn’t create such a specific gravitation or repulsion because she overlaps her figures in a chaotic way. Jung’s reference to Bosch’s painting is clear, if only because the composition is not strictly divided into foreground and background—and human-like figures fill the canvas.
But what questions did Bosch provoke in Jung? Is she giving answers to Bosch? In fact, summoning a 500-year-old painting might reveal a more conscious strategy, allowing the painter freedom to paint whatever s/he wants while riding on the mood or the temperature that the older painting suggests. It may be an excuse to paint half-humans behaving as they please; a justification for making a picture full of these creatures, focusing on our own moment with a fluidity of gender and behavior. It might also be a pretext for painting young, smooth bodies, perhaps disabling a weighty historical subtext.
2. Did Nymphs Always Look Like This?
Let’s look at the figures in more detail. The violet figures’ faces in Giving Answers to Bosch lean towards the feminine, but their bodies are more androgynous: well-toned torsos and limbs which cannot certainly be assigned as those of men, women, girls, or boys. They fall asleep, unconcerned by burning books next to them; they climb trees; throttle each other; or take photos on their smart phones; they play guitars and sing songs. One figure takes aim with a gun, but even this doesn’t seem a serious offence—or a preposterous deviation. The figures’ motivation seems closer to rash impulse than deep instinct. Jung says she was thinking of nymphs or spirits from Greek and Roman mythology when she painted these mischievous rather than sinister. They have an air of casual disregard, they are cute rather than drop-dead gorgeous.
Historically, nymphs have been represented as alluringly feminine—as embodied by the paintings of William-Adolphe Bouguereau and John William Waterhouse. In Bouguereau’s Nymphs and Satyr (1873), the bodies of the nymphs remain soft and smooth even as they suppress the powerful Satyr, half-man and half-beast. The spirits represented by Waterhouse in his Hylas and the Nymphs (1896), have transparent skin and delicate joints, it appears all their energy is concentrated into assuming ethereal, dream-like expressions. In truth, for several centuries, nymphs have been an excuse for lascivious male painters to depict dangerously young women. Of course, Bouguereau and Waterhouse didn’t need to worry about any kind of judgement, they were free to paint young female bodies in precisely the way they wanted to.
So, did Jung consciously try to resist this custom of presenting nymphs as feminine objects? Of course, there is room for interpretation here. It doesn’t seem like the reinterpretation of nymphs was a priority for Jung, judging by her relationship with Bosch’s triptych. She does not use nymphs so differently from her predecessors. In other words, Jung can’t really separate her homogeneous desire from Bouguereau’s or Waterhouse’s—being as it is a desire to paint young, healthy bodies. Whether this has been learned in an art-historical context, or is the result of an inherent visual system which continues to stubbornly objectify the female body is a moot point. Jung’s nymphs don’t stop being lovely just because they are sexualized in an ‘atypical’ way. They still have cute butts and soft lined features; they still look good—complete with neat bobbed hairstyles. They merely look suitable for satisfying another urge, with their flat bodies and the ritualized ways in which they complete their duties. They display their postures and actions all too clearly. After unnecessary signs like breasts and genitals are gone, each figure moves in a flash, and according to its will. We cannot really call them noble. But neither can these spirits be castigated for their irresponsible behavior, because they are not humans—and neither are they gods. Their energy erupts ‘on the hill’ and in a ‘birth with red sunset’. They have the ability to walk ‘across the mountain of nights.’ They protect the ‘east forest’ and ‘autumn mountain’.
Jung didn’t need to abandon the mythical milieu in which nymphs succumb to desire, where they kidnap Adonis, or frolic with a god. Instead, she happily hitches a ride on this set-up, which has been an irresistible subject across several centuries, and paints figures who do whatever they want to do in an utterly shameless way. In this sense, Jung extracts an appropriate reference point from an enormous legacy or database and, in parallel with it, paints whatever she wants.
3. What If Spirits Were Reborn as Paintings?
So, arbitrary nymphs are painted on the canvas, they hold Bosch’s triptych as security and take the long mythology of nymphs as their sources. But the same conditions which make Jung’s nymphs possible are also revealed in several formal elements of her paintings.
Look After Autumn Mountains, Send you Sunset, Heaven’s Door, and Talk about Fruition of Fresh Fruit all contain a bilateral symmetry. Symmetry on a flat surface presents us with stability in an instant. On the basis of this, disparate surfaces, colours, thicknesses, and textures meet. Here, we might find a pencil sketch drawn directly onto canvas; next to it, heavier paint; next to this, the background becomes foreground by obscuring figures horizontally or perpendicularly. Jung’s pieces without symmetry, like Person Born with Red Sunset, or Person Born on the Hill, usually retain perspective by placing a god-like figure in the central foreground. Other elements in the paintings, such as thicker, more expressive paint, look more like embossed patterns than natural Matière. Composition and symmetry function as an armature for tangled textures and create the paintings’ senses of mass. Like Jung’s figures, who behave as they please and follow temptation—Jung’s paintings seem to examine just how mischievous they can be. In formal terms, they operate without much of a safety net. As time goes by, spirits exist only as portraits, they give up their original bodies. Maybe Jung’s painting is attempting to move into the spaces they have left—and become something like a spirit itself.
[1] Gibson, Walter S. (trans. Kim Sook) Hieronymous Bosch: Fantasy and the Bizarre in the Late Medieval Age, Sigongsa, (Seoul), 2001
“믿고 싶은 것과 믿을 수밖에 없는 것 사이의 세계”
전영진
정수정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 낸 세상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는 긴 서사의 단편들을 담은 이미지다. 작가는 글자 없는 그림책의 부분들을 한 장면씩 그리고 또 보이며 이것이 이야기의 어디쯤 위치할 장면인지, 어떤 부분을 의미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유도한다. 관객은 본능적으로 이 그림책의 줄거리를 읽으려 퍼즐을 맞추듯 작품의 순서를 고민할 것이다. 작가는 언뜻 보기에 명확하지 않은 장면에 순서를 추측할만한 힌트를 남겨 놓았다. 관객은 반복된 교육으로 몸에 익은 흔한 서술구조에 따라 세포 혹은 우주로 보이는 이미지에서 탄생이라는 시작을, 꿈틀거리며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유의미한 생명체를, 그렇게 자라난 인간의 형태를 띤 생명체의 일과를, 그들이 모여 만들어 낸 미지의 세계를 차례로 느끼게 된다.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는 ‘신god’이다. <Nymph, 2018>, <열매를 기리는 헬퍼, 2018>, <동산에서 태어난 자, 2018> 등의 작품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신화를 바탕으로 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작품을 차용한 장면의 구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신들은 정면을 응시함으로써 ‘감시자big brother[1]’가 되기도 하고, 두 손을 곱게 모아 마리아Maria가 되기도 하며, 동물의 모습을 닮은 님프Nymph가 되기도 한다. 편하고 익숙한 인간의 모습을 한 피조물은 시점이나 자세, 행동에 따라 여러 형태의 신이 된다. 곧 작품 대부분은 이러한 신들의 탄생과 자람, 응시, 활동의 장면을 담은 것으로 그 자체가 작가가 만든 세계에 대한 묘사들이다.
보쉬Hieronymus Bosch의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 쾌락의 정원, 1504>에 대한 답으로 그렸다는 작가의 작품 < Giving Answer to Bosch 보쉬에 답하다, 2018>에서 그의 세계와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다. 먼저 보쉬의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은 가로 약 4m의 여닫을 수 있는 세 폭 제단화triptych로 왼쪽부터 ‘에덴동산-연옥(혹은 유토피아utopia[2])-지옥’이 여러 상징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비교적 명확하게 에덴동산과 지옥으로 표현된 좌우 날개Wing 부분과 달리 중앙의 패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나뉘는데, 정수정의 <Giving Answer to Bosch>는 특히 이 중앙부분과 내용으로 궤를 같이하며 형태적 유사성을 띤다.
정수정의 작품은 연결 또는 분리되는 5폭의 가로로 긴 그림으로 보쉬의 것과 달리 공간을 나누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시공간으로 균등하게 표현되었는데, 마찬가지로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dystopia[3] 등 여러 의미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여러 미술사가가 보쉬의 작품을 해석해온 것과 같이 관객 역시 정수정의 작품에 여러 해석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각자의 모든 해석의 세계에는 공통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분법이 없다. 실제와 환상, 선과 악, 남과 여, 젊음과 늙음, 기쁨과 슬픔 등. 사실 작가가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요구하는 유일한 바는 그 ‘구분되지 않음’에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구분되지 않음은 결국 보쉬의 작품 중 좌측 날개에 표현된 에덴동산과 연결된다. 에덴동산 장면은 모든 자연의 피조물들이 공존하고, 구분과 경계가 모호하며 완벽한 세상을 그리고 있다. 나아가 보쉬 작품의 우측 날개에 표현된 ‘자연’이 완전히 배제된 지옥은 정수정의 작품에서 문명을 대변하는 총, 기타, 공, 책, 야구 배트 등의 공산품으로 상징화되어 작품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장면을 옮겨오면서 상징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는 사라지고, 작가의 의도대로 객관적이고 담담하게 담겼다. 결론적으로 정수정의 세계는 <쾌락의 정원>의 세 패널의 합쳐진 공간, 즉 ‘자연-인간-문명’의 경계가 모두 무너진 한 층 더 현대적인 에덴동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작은 장면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긴 하나의 장면은 보쉬가 제시한 세계에 대해 현시점으로 응답한다. 그 속에서 관객은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해 논리와 과학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와는 정반대에서 무형의 신을 만들어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오히려 진실과 멀어지는 인간이라는 양극단의 모습. 신화와 종교(혹은 이단)적 요소를 심어 대단한 과학적 발전에도 여전히 허상을 좇는 우리를 읽어낼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세상 역시 보쉬의 그림이 그러하듯 우리의 현실을 평평하고, 무덤덤하게 담고 있다. 이로써 작가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못하는 인간의 양가감정과 이중성이라는 무형의 것, 보이지 않는 힘과 이끌림을 유형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없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예술가의 지위는 사실 세상의 무엇도 지휘하지 못함에도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감정 혹은 생각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다. 작가는 이러한 정제된 통제력을 그의 그림 속에 실제적이지 않은 형태의 이미지와 2~3차원을 자유로이 운용하며 담아냈다. 그의 생명체(드로잉)는 물감(색)을 먹고 자라난다. 작가는 밑그림을 그려 채색을 해 그림을 완성하는 긴 시간을 탄생으로부터 성장을 통해 하나의 생명체로 완성되는 과정으로 비유하였다. 피조물이 스스로 완성되기 위한 에너지 혹은 곁에 두고 함께 생활하는 반려 체로 표현된 미술 질료medium는 캔버스 표면에 부피감을 드러내며 캔버스 밖 감상자를 끌어들인다. 피조물의 우상화를 위한 장식으로도 이용되는 그 질감은 작품의 표면과 실제를 연결하는 통로로 작용하여 그림 속 신과 그림 밖 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서로를 응시하며 인간은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게 되고, 신은 인간에 대한 그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 순간의 경험이 곧 작가가 구축한 세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다. 작품 속에서 미완성 혹은 드로잉으로 남겨진 부분은 관람자에게 바라보는 것만 가능한 그의 지위에 머무를 것을 강요하고, 예술이 가진 한계를 친절하게 설명하며,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예술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믿고 싶은 것과 믿을 수밖에 없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우듯 말이다.
[1] 사회학적 통찰과 풍자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소설 《1984년》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긍정적 의미로는 선의 목적으로 사회를 돌보는 보호적 감시, 부정적 의미로는 음모론에 입각한 권력자들의 사회통제의 수단을 말한다. – 출처:doopedia.co.kr, (2018.9.23)
[2] 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키는 말. 원래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의 '없는(ou-)', '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용어인데, 동시에 이 말은 '좋은(eu-)', '장소'라는 뜻을 연상하게 하는 이중기능을 지니고 있다. – 출처:doopedia.co.kr, (2018.9.26)
[3] 역(逆)유토피아라고도 한다. 가공의 이상향, 즉 현실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을 가리킨다. – 출처:doopedia.co.kr, (2018.9.26)
“The world between what we want to believe and what we have to believe”
Youngjin Jun
The works of Soojung Jung are not separate entities. Instead, they are scraps of images taken from long narratives – beginning with the birth of the world – as created by the artist. Jung presents us with a part of a picture book minus text, which leads us to questions about where the story is set and what just one part of it might mean. Viewers instinctively think about the order of the works, puzzled by the plot of this ‘picture book’. The artist leaves a hint of ambiguity in the order of these ambiguous scenes, which at first glance, are hard to figure. Viewers can read her paintings as a sequence of images. In them, they recognize a traditional narrative which begins with universe and cell-like images, implying birth. From primordial, abstract fields, creatures wriggle forth, emerging and struggling to assume human form. We see them now in their everyday lives, living in an unknown world.
One motif that appears often in the work is 'God'. We can see this through Jung’s composition – which borrows from Sandro Botticelli’s mythology – as well as in titles such as Nymph, Helper who Praises Fruit, and Person Born on the Hill (all 2018). These gods become a kind of 'big brother'[1], staring straight out at the viewer. They also refer to the Virgin Mary, with their hands together, surrounded by animalistic nymphs. A creature with a comfortable, familiar human form becomes a god through its viewpoint, attitude, and behavior. The works contain ideas of birth, growth, the gaze, and the activities of the gods. Together, these describe a complete world – as created by the artist.
In Giving Answers to Bosch (2018), Jung’s response to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c.1504) by Hieronymus Bosch, we see this world – and world view – as a whole. Bosch's Garden is a folding triptych which can be opened to around 4m in width. From the left, the Garden of Eden, purgatory (or utopia[2]), and hell are depicted via the use of various symbols. Unlike the wing panels, which represent the Garden of Eden and Hell very clearly, the interpretation of the central panel is more ambiguous and is divided into various parts. Jung’s Giving Answers to Bosch shares a formal and narrative similarity with this center panel. Jung’s piece is a long, horizontal picture of five connected panels. Unlike Bosch's, these panels do not divide the painting, instead, the entire space is represented evenly; and we are presented with one specific time and space. This leaves room for greater interpretation. Is this place utopia or dystopia?[3] Just as various art historians have interpreted Bosch's work, so Jung’s work will also have several interpretations. However, there are not many dichotomies that exist in common with the world we know: rreality and fantasy, good and evil, men and women, youth and decline, joy and sorrow, etc. In fact, the only thing Jung intentionally demands from the viewer is recognition of the ambiguous or indivisible. Paradoxically, however, this distinction leads us back to the Garden of Eden, which is described in Bosch’s left-hand panel. The scenes of the Garden of Eden show the perfect world, where all creatures coexist happily and boundaries are indefinite; so, divides here are equally hard to identify. Furthermore, ‘hell’ completely excludes nature. This is echoed in Jung’s work by her focus on the products of civilizations: guns, guitars, balls, books, baseball bats, and so on. However, as the scene develops, the negative image of these symbols disappears, and becomes objectively and coolly described – intentionally so. In conclusion, it can be seen that Jung’s world describes a modern Garden of Eden, where the boundaries of the three panels of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 – the boundaries of nature/human/civilization have entirely collapsed. This one scene, tightly filled with smaller sub-scenes, responds to Bosch with a view of the current world. In this painting, viewers witness their own presence: pursuing delusion, relying on elements of myth and religion even in the face of great scientific development; seeking confirmation by looking for truth with logic and science. We also see ourselves having the opposite reaction, creating a formless ‘god’ and placing absolute trust in it, always moving further from the truth. Jung's non-existent world, much like Bosch's once did, reflects our own world in a flat, placid way. Using this language, Jung expresses the ordinarily intangible: human beings’ ambivalence and duplicity. In Jung’s world, attractive, tangible images give us an insight into something unsettling and invisible.
In spite of not being able to change the world, artists maintain a certain power in that they can drag out feelings and thoughts which exist beyond language. Jung exercises this refined control in her paintings via unrealistic forms of image and an unconstrained merging of two or three dimensions. The life of Jung’s initial creatures (as initially drawn) is given to them by paint (colour). Jung compares her lengthy process, which involves long periods of drawing and, subsequently, painting, to the processes of birth, growth, and finally, the completion of one’s life. Materiality in Jung’s work is expressed as energy, or is a companion for her creature’s self-completion. It draws viewers outside of the canvas by exposing a sense of mass. Texture, which acts as a means of implying a creature’s idealized mythology, also acts as a channel which connects the illusory painted surface and the real world. As such, it breaks down the boundary between the intangible gods in the painting and the physical human being outside the painting. Staring at one another, humans escape from their desire to make themselves divine. Meanwhile, thanks to humans, Gods experience moments of departure from their own roles. The experience of that moment is the direct result of a world built by the artist. The unfinished or drawn elements in the work force the viewer to look longer and harder – to stay in a space between the painting and the world. This describes the limitations of art, and reveals the paradox that everything we dream is possible – but only in art. It reminds us of the fact that there is no space at all between what we want to believe and what we have to believe.
[1] A term derived from the novel "1984" by British novelist George Orwell (1903-1950), famous for his sociological insights and satires. In a positive sense, it connotes protective ifluence which cares for society for the purpose of good. In a negative sense, denotes an intrusive and oppressive way of controlling society.
[2] An idealized place or mental space that does not exist in reality. Originally coined by Thomas Mower, it is a combination of two Greek words: 'ou' (meaning ‘no’) and 'toppos' (meaning ‘place’). At the same time, it implies a very similar Greek word ‘eu’ (meaning ‘good’). As such, it is a pun which contains dual functions. - Source: doopedia.co.kr, (2018.9.26)
[3] Also called a reverse utopia. In contrast to utopia, which depicts ideal locations, it refers to literary works and ideas which sharply criticize reality by depicting dark worlds which exist - or may exist in future if things do not change. - Source: doopedia.co.kr, (2018.9.26)